
단편집은 단 하나만 뛰어나도 그 가치가 빛난다
★★★☆☆
‘법의 체면’라는 작품입니다.
도진기 작가님의 단편집입니다. 미스터리 형식을 빌리면서 사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소설들을 담고 있습니다. 타이틀인 법의 체면은 제일 먼저 등장하는 단편으로 기존 판결의 권위를 이유로 명확한 증거가 있음에도 무죄를 선고하는 상황을 꼬집고 있지요. 사건의 진실이 아닌 체면과 관습이 법의 이름으로 우선시되는 현실을 풍자하는 셈입니다.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완전범죄가 가장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매력을 풍깁니다. 순서의 문제에서 느꼈던 전율을 이 편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는데요. 보통 완전범죄라 하면 범인의 치밀한 계획과 실행 과정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선을 달리합니다. 범죄자가 아니라 검사와 판사에게 이야기를 집중시켜 그들의 역할과 판단이 범죄의 완전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줍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상상조차 못하는 사이에 법을 다루는 자들이 자신들만의 완전범죄를 이루어내는 구조입니다.
애니라는 단편은 SF적 요소를 품고 있는데요. 꿈 속의 삶에서 인공지능이 살인 괴물로 변하면서 스릴러적 요소가 크게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메간처럼 인공지능 로봇이 직접 인간을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 작품 속의 위협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인간의 신경과 연결된 소프트웨어에서 비롯됩니다. 눈앞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대신 보이지 않는 통로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교란하며 피해를 입히는 방식은 훨씬 더 섬뜩하고 현실적입니다.
나머지 단편들은 범인의 행동이 쉽게 예측되거나 긴장감이 부족해 다소 심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단편집이라는 형식 특성상 여섯 편 모두가 고르게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범죄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읽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도진기 작가님의 작품을 읽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다만 작가님의 건강 문제로 인해 앞으로 진구와 고진 시리즈를 예전처럼 빨리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나라의 도진기 작가님을 비롯해 일본의 이케이도 준, 치넨 미키토 같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직장 생활 경험을 미스터리와 절묘하게 결합시켜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를 꼭 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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